나는 원불교 교도는 아니다. 어떤 특정한 종교를 신앙하지도 않는다.
1960년대 정치적 억압과 독재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착취에 반대해 힘겹게 싸우던 시기에 대학을 다녔고, 그 시기 사회변혁운동가(사회주의자)로써 스스로를 자리매김함으로서 대학 시절 영혼에 스며들었던 불교와의 만남은 내 마음 깊숙이 숨게 되었다.
그리고 15여년 학생운동, 농촌운동, 교사운동, 지하비밀운동 등 사회변혁운동에 전념하였다.
그 목표는 자주, 자유, 평등이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었다. 나는 그것을 혁명적 사회주의에서 찾았다.
70년대 후반 국내적으로는 유신(維新)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적 요구의 모순이 심화되고, 국제적으로는 세계 공산주의가 쇠퇴와 붕괴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 시기 나중에 남민전 사건으로 알려진 일련의 활동에 관여하게 되면서, 민주주의와 현실 사회주의 사이의 간극과 사회주의 혁명의 환상 내지는 허구에 대한 자각으로 극심한 사상적 갈등을 경험한다. 그리고 스스로 사상적 전환을 하고, 지금까지의 관계를 청산한다. 그러나 그 때까지의 활동이 문제가 되어 4년여 징역을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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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오늘날의 현실로 생각이 미쳤지만, 내가 감옥에 있으면서 그리고 감옥을 나와서 줄곧 생각한 것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위한 종합 철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구였다. 1984년 경으로 기억되는데, 어떤 친구가 나에게 준 책이 <원불교전서>였다. 이 책을 여는 순간 첫장의 문구에 그만 압도되었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이었다. 그 후 얼마가 지나 친구가 주지로 있던 암자에서 15일 정도 생각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썼던 글이 ‘혁명에서 개벽으로’였다.
물질이 개벽되니
이 ‘물질이 개벽되니’ 라는 말이 범상한 말이 아니다. 아직 서양의 물질문명이나 과학기술의 힘, 생산력, 근대적 제도(물질과는 다르지만 형태가 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물질로 간주할 수도 있을 듯)와 접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물질의 개벽을 이야기한 것이 대단한 선견지명이라는 것과 함께, 정신개벽 이전에 거쳐야할 단계로서 물질개벽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 세계사를 관철하고 있는 보편적 경향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없이는 하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자연계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도 높은 ‘자유욕구’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자유욕구의 첫째 테마는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 불(火)과 도구의 사용, 농경과 목축의 시작은 자연적 제약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자유욕구와 지적능력의 결합’의 출발이었고, 지금의 고도한 과학기술능력으로 발달하였다.
정신을 개벽하자
이 현대의 근본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무엇일까? 인간의 행위능력을 억제하거나 스톱시키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방향은 인간의 관념을 변혁하는 쪽으로 지적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즉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의 혁명이다. 이것이 ‘정신을 개벽’하는 것이다.
이미 2500여년 전, 인류의식의 높은 꽃봉오리들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물질이나 제도와 관계없이 정신이 개벽된 사람들이 동서양에 동시에 나타나는 빛나는 축(軸)의 시대가 있었다. 석가,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같은 사람들인데, 우리는 그들을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다름에도 한결 같이 관념계 안에서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였다. 진정한 자유인의 출현이며, 동물계로부터 질적으로 진화한 ‘인간’의 출현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이러한 자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의 물질적 사회적 진보를 기다려야 했다. 절대적 궁핍과 억압 착취 속에서는 ‘관념계의 자유’는 보편적 목표가 되기 힘들었다. 여러 종교가 출현했으나 불의한 사회구조 속에서 왜곡되기 쉬었다. 물질적, 사회적 자유를 어느 정도 달성하고 나서 비로소 ‘관념의 자유’ 즉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목표로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역사의 진보다.
이제는 보통 사람들이 성인이 되는 시대이다. 이제 신(新) 축(軸)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인문운동가를 자처하고 있다. 내가 이야기하는 인문운동이란 인간화 운동이다. 인간화는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며,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의식을 해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이러한 진화를 통해 비로소 우주자연계의 암세포가 아니라 신경세포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의미로 나에게는 다가온다. 1세기 전 아직 근대조차 경험하지 못한 이 땅에서 이런 본질적이며 선구적인 주장이 나온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나는 1세기 전 이미 이런 사상을 배출한 이 땅에서 미래를 열어갈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명을 바라보고 그것을 위해 즐겁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인류라는 화원에 빛나는 꽃봉우리들로 수없이 피어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업보(?)라고 생각한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별적인 능력은 뛰어나지만, ‘개별주체성’이 강해서 협동이나 공동체적 삶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있고, 어떤 점에서 보면 진정한 협동의 문화가 축적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세기 전 민족의 염원이 대단히 선구적인 ‘개벽’사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의 정신은 물질과 제도 그리고 마음이 새로운 문명의 용광로 속에서 녹아 하나로 되어야하는 시대적 요구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원불교 100년기념성업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많은 분야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기를 바란다.
이글은 한계례신문 휴심정에 실린글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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